엘베그 니굴세그치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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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1394년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여 1399년 오이라트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그는 즉위 이전 명나라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고하이 태위 살해, 아들 살해 및 며느리 강제 획득 등 폭군적인 행보를 보였다. 오이라트와의 갈등 속에서 우게치 카스하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사후 군 테무르 칸이 즉위했다. 몽골의 연대기에서는 폭군으로 묘사되며, 가계와 출신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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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그 니굴세그치 칸 | |
---|---|
기본 정보 | |
칭호 | 카간 |
이름 | 엘베그 (Элбэг; 額勒伯克) |
칭호 (몽골어) | Нигүүлсэгч хаан |
칭호 (몽골어, 유니코드) | ᠨᠢᠭᠦᠯᠡᠰᠦᠭᠴᠢ ᠬᠠᠭᠠᠨ |
칭호 (중국어) | 尼古埒蘇克齊汗 |
통치 | |
재위 기간 | 1394년 – 1399년 |
즉위 | 1394년 |
선임자 | 엔케 칸 |
후임자 | 귄 테무르 칸 |
개인 정보 | |
출생 | 1362년 |
사망 | 1399년 |
배우자 | 코베군타이, 올제이투 비자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왕조 | 북원 |
자녀 | |
자녀 | 오르제이 테무르, 하르그추크 두렌 테무르 홍타이지, 삼루 공주 |
2. 생애
1394년 엥크 칸이 사망하면서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이 몽골의 대칸 자리에 올랐다.[4] 엘베그 칸의 즉위 년도에 대해서는 1393년 즉위설과 1394년 즉위설이 있는데, 1393년 즉위설에 따르면 엥크 칸 재임 중 일부 지지자들의 추대를 받아 대립 황제로 즉위한 것이 된다.
선선대 칸인 조리그투 칸(예스데르)는 아릭부케 가문의 인물이면서도 쿠빌라이 가문의 적통인 우스할 칸(천원제 토구스 테무르)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 무렵의 북원 사회는 제위를 둘러싸고 매우 불안정한 정세에 있었다.
1399년, 엘베그 칸은 "눈처럼 피부가 하얗고, 피처럼 뺨이 붉은" 절세 미녀를 원하여, 오이라트의 고하이 태위의 권유로, 자신의 아들[6] 하르구추크 두렌 테무르 홍타이지의 아내 올제이트 비자를 빼앗으려 했다. 고하이 태위에게 올제이트 비자를 데려오게 했지만, 올제이트 비자가 도리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자, 분노한 엘베그 칸은 아들 하르구추크를 매복하여 살해하고, 억지로 임신 3개월 된 올제이트 비자를 빼앗아 하툰으로 삼았다.
어느 날, 고하이 태위는 올제이트 비자를 데려온 공으로 승상 칭호를 받기 위해 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제이트 비자가 고하이 태위를 불러 수면제를 먹이고, 마치 고하이 태위에게 범해진 것처럼 꾸며 엘베크 칸에게 울며 호소했다. 사태를 알아챈 고하이 태위는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엘베크 칸에게 쫓겨 죽임을 당했다.
엘베크 칸이 고하이 태위의 등가죽을 벗겨 올제이트 비자에게 돌아오자, 올제이트 비자는 가죽의 기름을 핥으며 일련의 사건은 고하이 태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이 꾸민 계략임을 전하고,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올제이트 비자의 미모에 마음이 흔들린 엘베크 칸은 올제이트 비자를 처벌할 수 없었고, 또한 "부당하게 고하이 태위를 죽였다"고 반성하여,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트라 승상에게 자신의 딸 사무르 공주를 시집보내고, 돌벤 오이라트(오이라트 부족 연합)를 이끌게 했다.
당시 오이라트의 오게치 하시하는 자신의 신하 고하이가 살해된 일과, 그 아들을 함부로 승상으로 삼아 오이라트를 다스리게 하는 엘베크 칸의 행위에 분개하고 있었다. 이를 들은 엘베크 칸은 바트라 승상과 상의하여 오게치 하시하를 죽이려 했지만, 엘베크 칸의 정실 부인 코베군테이 하툰에 의해 먼저 오게치 하시하에게 이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즉시 출진한 오게치 하시하에 의해 엘베크 칸은 살해되었다.[8] 오게치 하시하는 올제이트 비자를 취하고 몽골 부족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다.
엘베크 칸의 사후, 즉위한 것은 아릭부케 가문의 군 테무르였으며, 쿤 테무르의 배후는 바로 오게치 하시하였다. 또한, 이 정변에 따라 황족 올제이 테무르가 몽골 고원을 탈출하여,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왕조 밑으로 망명했다.
2. 1. 대칸 즉위 이전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1360년에 태어났으며, 생일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1361년 출생설과 1362년 출생설이 있다. 엘베그의 가계는 불분명하여,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의 아들이자 엥크 칸의 동생 혹은 형이라는 설,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의 동생 설,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아들이라는 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아들 설, 쿠빌라이 칸 가문의 다른 후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4] 투메드부 출신 몽골의 역사가 사강 세첸에 의하면 엘베그는 북원 평황제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카안의 아들이라 한다.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아들 설을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고려인 김황후가 된다. 몽골원류에 의하면 그는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아들이라 한다. 그러나 황금사에 의하면 토구스테무르 칸은 후손이 끊어졌다 하여 《몽골원류》와 《황금사》 사이에 이견이 있다.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33세 때인 1394년에 즉위했다는 기록에서 역산하면 1361년 혹은 136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엘베그'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부자, 부유함, 친절함을 뜻한다.
1404년 티무르 제국의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던 카스티야 왕국의 사절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에 의하면, 그는 9개의 땅의 카안을 뜻하는 '도쿠즈 칸'으로 불렸다 한다. 클라비호는 타타르인과 다른 몽골인들이 그를 '텅스', 즉 돼지 황제로 조롱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엘베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일설에는 그가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아들 마이다리팔라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그가 마이다리팔라와 동일 인물이라면 1370년 응창부 함락 당시 명나라 군의 포로가 되어 명나라 수도 난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후 1374년 혹은 1380년에 석방되어 몽골고원으로 돌아왔다.
1380년대 초, 엘베그는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대명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387년 11월 부이르 노르(호수) 전투에서 북원군이 명군에게 대패한 후, 명나라 군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1392년까지 명나라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2. 2. 북원의 대칸 즉위 (1394년 ~ 1399년)
1394년 엥크 칸이 사망하자 엘베그가 몽골의 대칸 자리에 올랐다. 일부 기록에는 엘베그가 엥크 칸을 암살하고 대칸이 되었다고 한다. 몽골원류에 따르면 1393년에 즉위했다고 하고, 몽골 황금사, 황금사강에 의하면 1394년에 몽골 대칸에 즉위했다고 한다. 만약 1393년에 즉위했다면, 엥크 칸 재임 중 일부 지지자들의 추대를 받아 대립 황제로 즉위한 것이 된다.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은 아리크 부케 가문의 인물 혹은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아들로, 1388년 쿠빌라이 가문의 후손이었던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우스칼 칸이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기습하여 암살하고 대칸 자리를 빼앗았다. 이후 북원 사회는 원나라 귀족 및 일부 지지층의 명나라 투항과 자립, 대칸 위 계승 문제 등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니굴세그치 칸은 통치 초기 몇 년 동안 자비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니굴세그치는 중세 몽골어로 자비, 자비로운, 은혜로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보르지긴 엘베그는 자비로운 왕, '엘베그 니굴세그치 카안'(엘베그 자비로운 칸)으로 몽골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동몽골의 키야트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고, 명나라는 북원의 침략을 격퇴했다. 그는 예니세이 강 상류에 있던 굴리치에게 사자를 보내 종주권을 요구했으나 굴리치는 엘베그의 사자를 죽였다. 굴리치는 뒤에 엘베그의 암살에 가담한다.
1399년 눈처럼 피부가 희고, 피처럼 뺨이 붉은 절세의 미녀를 요구했던 니굴세그치 칸은 오이라트 초로스 씨족의 고하이 태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하르고초크 두구렌 테무르 홍타이지의 아내 올제이투 비자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사냥을 하던 니굴세그치 칸은 눈 위에 뿌려진 토끼의 피를 보며 흰 얼굴에 뺨이 핏빛인 소녀가 있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오이라트부의 고하이 태위가 자신이 그런 아름다운 여인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니굴세그치 칸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고하이 태위는 칸이 그녀를 보는 것은 어렵지만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하루구추크 두구렌 테무르의 아내 올제이투 비자를 지목했다. 니굴세그치 칸은 고하이 태위에게 명령하여 올제이투 비자를 데려오라고 시켰지만 올제이투 카툰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화가 난 니굴세그치 칸은 그녀의 남편 하루구추크를 매복하여 죽이고, 임신 3개월인 올제이투 비자를 강제로 아내로 맞아 카툰으로 삼았다.
어느 날 태위 고하이는 올제이투 비자를 데리고 온 업적에 의해 승상(칭상)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 칭호를 받기 위해 대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제이투 카툰이 고하이 태위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호소했다. 올제이투 카툰은 태위 고하이를 불러내 수면제를 탄 음료를 먹이고, 고하이 태위가 저지른 강간으로 가장해 니굴세그치 칸에게 읍소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깨달은 고하이 태위는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니굴세그치 칸에게 따라잡혀 살해되었다.
니굴세그치 칸이 고하이 태위의 피부를 벗겨 올제이투 비자에게 가자 그녀는 피부 지방을 핥으며 일련의 사건은 고하이 태위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행한 모략이었다고 실토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제이투 카툰의 미색에 빠져 있었던 니굴세그치 칸은 카툰을 처벌할 수 없었으며, 스스로 부당하게 고하이 태위를 죽여 버렸다고 반성하고는 살해당한 고하이 태위의 아들 바툴라(마흐무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딸 사무르 공주를 시집보내며 드르븡 오이라트(Durvun Oirad, 4개의 오이라트 부족)를 이끌도록 했다.
바툴라 칭상은 그의 아버지 고하이 태위가 엘베그 칸에게 봉사하고 울제이투 카툰을 소유하는 것을 도왔다는 사실에 대해 상을 받았다. 그러나 바툴라는 자신의 아버지 고하이 태위가 살해당한 일에 분개했다.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치세 동안 오이라트는 보르지긴 가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고 명나라는 북원 침략을 격퇴했다. 엘베그는 잘못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엘베그는 쿠후아이 다유와 사냥을 하던 중 갓 내린 눈 위에 토끼의 피를 보았다. 그는 읊조렸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 피처럼 붉은 뺨을 가진 여인이 있을까?" 쿠후아이는 대답했다. "저는 그런 아름다운 여인을 압니다. 그분은 당신 아들의 아내인 올제이투이시니, 당신이 만나서는 안 됩니다." 칸은 쿠후아이에게 그 여인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쿠후아이가 공주에게 소환 소식을 알리자, 공주는 칸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를 알고 크게 분노하여, 가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칸은 아들 두렌테무르를 죽이고 며느리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았다. 하지만 쿠후아이도 엘베그 칸에게 살해당했다.[2]
쿠후아이 다유 가문과의 적대 행위를 막기 위해 그는 딸 사무르 곤주를 쿠후아이 다유의 아들 바툴라에게 시집보냈다.[3]
당시 오이라트의 통치자였던 우게치 카시카는 자신의 부족 위에 새로운 통치자를 임명하려는 카간의 결정에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친족을 죽인 폭력적인 칸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바툴라를 설득했다. 바툴라는 또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했다.
1399년, 엘베그 니굴레세그치 카간은 4 오이라트에게 패배했고, 그 지도자 우게치 카시카와 바툴라에게 살해당했다. 사강 세첸에 따르면 그의 사후 그의 왕위는 맏아들 군 테무르 칸이 계승했다. 엘베그의 올제이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질투한, 칸의 주요 배필 코베군타이와 동맹을 맺은 우게치 카시카는 그의 하렘과 모든 재산을 압수했다.
2. 3. 오이라트와의 갈등과 암살
오이라트의 토르구트부 수장 노얀 우게치 카스하는 고하이가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을 마음대로 승상으로 임명하여 오이라트를 이끌게 한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행위에 분노했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바툴라(마흐무드) 승상 또한 니굴세그치 칸을 원망하게 되었다. 우게치 카스카는 명나라의 지원을 얻었다.[8]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바툴라 칭상과 상담하여 우게치 카스카를 죽이려고 했지만, 대칸의 정실이었던 코베군테이 대카툰에 의해 먼저 우게치 카스카에게 음모가 알려졌다. 이에 즉시 출진한 우게치 카스하에 의해 1399년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은 시해당했다.[8]알탄 톱치에 의하면 오이라트부의 바툴라 칭상이 엘베그 칸을 암살했다고 한다. 그의 잘못된 행동이 몽골 사회에 해를 끼쳤다는 평을 남겼다. 이후 우게치 카스하는 올제이투 카툰을 차지하고, 몽골 부족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넣었다. 이후 오이라트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립했다.[8]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치세 동안 오이라트는 보르지긴 가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고, 명나라는 북원 침략을 격퇴했다. 엘베그는 이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당시 오이라트의 통치자였던 우게치 카시카는 자신의 부족 위에 새로운 통치자를 임명하려는 카간의 결정에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친족을 죽인 폭력적인 칸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바툴라를 설득했다. 바툴라는 또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했다.
1399년, 엘베그 니굴세그치 카간은 4 오이라트에게 패배했고, 그 지도자 우게치 카시카와 바툴라에게 살해당했다. 사강 세첸에 따르면 그의 사후 그의 왕위는 맏아들 군 테무르 칸이 계승했다. 엘베그의 올제이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질투한, 故 칸의 주요 배필 코베군타이와 동맹을 맺은 우게치 카시카는 그의 하렘과 모든 재산을 압수했다.
3. 평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이라트부는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고, 명나라는 몽골의 변경을 침략했다. 고대 몽골에서는 사슴, 토끼, 늑대를 함부로 해치는 것을 금기시했다. 엘베그는 몽골인이 신성시하던 토끼를 죽인 일로 인심을 잃었다. 몽골인들은 그가 토끼를 함부로 죽인 일로 하늘의 벌을 받아 쫓겨났다고 여겼다.[11]
투메드부 출신 몽골 역사가 사강 세첸은 엘베그 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평가했다. 몽골 연대기 『몽골원류』와 『황금사강』에서는 그를 폭군으로 묘사한다. 『몽골원류』에 따르면, 오이라트의 고하이 꾐에 빠져 동생 하르구추크 두렌 테무르 혼타이지(실제로는 "혼타이지(황태자)"라는 칭호로 보아 동생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함)를 죽이고 그의 아내 올제이토를 빼앗았으며,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는 올제이토의 계략에 빠져 고하이 태위를 살해했다. 엘베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고하이의 아들 바트라에게 딸과 승상의 지위를 주었지만, 이러한 후한 대우가 오게치 하시하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결국 오게치 하시하에게 살해되었다.[11]
차하르부에서 편찬된 연대기 『갠지스 강의 흐름』에서는 선대 엔케와 엘베크의 사적이 혼동되어 '엔케 엘베크'라는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델베그 칸 | 일설에는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의 아들이라고도 함 |
황후 | 코베군테이(库伯衮岱) | |
자녀 | 군 테무르 토코간 칸(1377 ~ 1402) | 아들 |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1378/1379/1384 ~ 1412) | 아들 | |
사무르 공주(Самур) | 딸, 에센 타이시의 할머니 | |
두렌테무르 황태자 | ||
손자 | 타이순 칸 | 아자이의 아들 |
아그바르진 | 아자이의 아들 | |
만두울 칸 | 아자이의 아들 | |
군 테무르 칸 | 논쟁 있음 | |
올제이 테무르 칸 | ||
사무르 군지 |
참조
[1]
간행물
15世紀中葉前的北元可汗世系及政局 (Genealogy and political situation of the Northern Yuan Khans of the mid-15th century)
2000
[2]
서적
Altan Tobchi
[3]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 How the Daughters of Genghis Khan Rescued His Empire
[4]
문서
33歳で即位」は『蒙古源流』に従い、「戌年に即位」は『黄金史綱』に従う。『蒙古源流』はジョリグト・ハーンとエンケ・ハーンを誤って一人の人物(エンケ・ジョリグト・ハーン)としており、その没年は信用できるものではない。エンケ・ジョリグト・ハーンの没年がずれているため、エルベク・ハーンの生年(辛丑年=[[1361年]])、即位年(癸酉年=[[1393年]])も1年ずつずれている(Buyandelger2000,p135)
[5]
문서
もとの[[ナイマン]]部で後の[[チョロース]]部。チョロース部は後に[[ドルベト (オイラト)|ドルベト]]部と[[ジュンガル]]部となる。
[6]
문서
『黄金史綱』ではエルベク・ハーンの息子とするが、『蒙古源流』は弟であるとする。「ホンタイジ=皇太子」という称号から見て、実際には息子であるとする説が主流である。
[7]
문서
もとの[[ケレイト]]部で後の[[トルグート]]部。
[8]
문서
岡田 2004,p178-182
[9]
문서
井上 2002,p136-137
[10]
문서
Buyandelger2000,p132-136
[11]
문서
『黄金史綱』では、エルベク・ハーンはオゲチ・ハシハとバトラの2人によって殺害された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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